입력: 2009-10-08
에드바르 그리그(Edvard Grieg)는 1843년 6월 15일 베르겐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일생 동안 세계적인 작곡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습니다. 체구는 비록 작았지만 정의, 진실 그리고 연대의식을 위한 예술적인 기운은 컸습니다. 그는 노르웨이 민요들을 정비함으로써 노르웨이의 국가적인 문화를 강화시키는 데 노력하였습니다. 오늘날 많은 노르웨이인과 외국인들은 그리그의 음악이 노르웨이 국가정체성의 없어서는 안 될 요소라고 여기고 있습니다.
자유를 갈망했던 그리그
그리그가 스웨덴으로부터 독립한 지 100년이 지나고, 1800년대 말과는 전혀 다른 국제적인 위치에 있는 오늘날의 노르웨이에 생존해 있다면 그의 음악적인 시각은 크게 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그가 살아 있을 당시 노르웨이는 가난한 나라였고, 당시 지배국과 합병된 상태를 벗어나고자 하는 여러 나라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이렇게 노르웨이의 해방에 대한 갈망이 그리그를 작곡가로 만든 것입니다.
낭만파 그리그
그리그는 자신을 낭만파이자 어린 아이로 생각했습니다. 입센(Henrik Ibsen)과 비에른손(Bjørnstjerne Bjørnson)은 모두 1880년대 말에 사실주의로 돌아섰지만 그리그는 자신의 낭만주의적인 생각을 억누르는 것은 약하고 비겁하다고 여겼습니다. 그는 모든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신비주의자였습니다. 자연 안의 아름다움과 진실 안의 아름다움을 찾아냈습니다. 그는 독일에서 받은 슈만(Robert Schumann)적인 음악 교육과 더불어 노르웨이 자연환경을 그린 그림들에 대한 이미지를 자신의 음악에 결부하였고, 노르웨이 민요에 깃들인 화음으로부터 본인의 신비로운 음악 색깔을 발견하였습니다. 자기가 사용하는 화음과 노르웨이 전통 민요에는 신비로운 관계가 있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습니다. 노르웨이 민요를 깊이 파고들면서 새로운 화음들을 "우연히"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리하여 그리그는 오랜 기간 동안 유럽 내에서 독특한 화성법을 새롭게 창조하였고, 이는 데뷔시(Achille-Claude Debussy), 버르토크(Bartók Béla) 등의 음악가들이 이어나갔습니다.
음악의 사회적 역할
그리그는 한 사회에서 음악의 중요성에 대한 강한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는 노동자와 빈곤층을 위해 무료 공연을 여러 차례 시행하기도 하고, 한 공연에서는 "오늘 저녁은 어린 시절 꿈을 이루는 그런 날이다. 고대 그리스처럼 예술은 모든 이들을 위한 것이다. 왜냐하면 서로의 마음을 소통하기 때문이다. (중략) 예술은 국민의 것이다!"라는 글을 올렸습니다. 예술에서는 계층이 없고, 그렇기 때문에 한 사회를 위해 교육적인 측면을 줄 수 있다고 주장한 것도 그리그입니다.
비록 그리그가 자칭 낭만파였지만, 현대적인 변화에도 관심을 가졌으며 혼자 뒤쳐지는 것을 매우 두려워 했습니다. "나는 죽음을 두려워 하지는 않지만 한 가지 두려워 하는 것이 있다면 바로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중략) 목적이 도대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없는 모험에 젊은이들이 뛰어드는 것 (중략). 요약하자면 나이가 들면서 점점 다가가는 영혼의 전초에서 무엇이 진실되고 무엇이 대단한지 느낄 수 없게 되는 것이 두렵다. 그래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정신 세계의 어두운 면들을 전부 알고 싶어하는 본능적인 욕구가 솟구친다."
출처: 아레 프로데 쇠홀트(Are Frode Søholt), 2007 그리그페스티벌